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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 출발점

-집중하기

 

1 마음을 한 곳에 모으기

마음이 침착하고 흔들림이 없을 때만이 냉정하고도 합리적인, 그리고 객관적인 통찰력을 갖는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은 명상의 출발이자 통찰력을 키우기 위한 토대이다.

사마디(Samadhi)마음을 가다듬어 모든 바깥 경계와 망령에 흔들림 없이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집중(samatha;止, 또는 samadhi;定; 三昧)은 마음을 한 점으로 모으는 것인데, 모든 그릇된 대상을 설정하는 마음의 카르마를 멈추는 훈련이다.

그래서 사마디는 지() 또는 평온 유지하기라고도 한다.

사마디는 생각과 감정이 생겨나는 것(becoming)을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혀 존재 자체(being)가 되는 것이다.

말을 멈추고 생각을 멈출 때, 우리는 진정한 자아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부활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죽음과 더불어 또다시 태어난다.

 

2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혀야 집중력이 생기므로, 먼저 호흡을 세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일어났다가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내 버려둔다.

생각에 끌려들어 가면 안 된다.

편안한 상태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숙달되면, 어떤 대상을 정해 놓고 집중하는 훈련을 시작한다.

집중의 대상은 우리에게 친근한 상(像)이나 사진, 모나리자, 꽃, 천체, 만다라 등 어느 것이나 괜찮다.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고, 정신을 대상에 집중한다. 마음속에서 생각이 일어나거나 감정의 변화가 생겨도 신경 쓰지 말고 대상에만 집중해야 한다.

처음에는 마음이 이리저리 흩어지기 때문에 실망하겠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계속 훈련해야 한다.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갖다 싶으면 즉시 다시 대상을 향해 돌이키는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조금씩 조금씩'.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행복의 열쇠는 작고 단순하고 겉보기에는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매일 하는 것이다.

 

3 집중의 대상

 

가장 기본적인 집중의 대상은 호흡이다.

정련된 호흡을 통하여 응념(凝念)에 돌입한다.

응념이란 마음을 한 곳에 매는 것, 즉 의식의 흐름을 중지시키고 하나의 점에 고정하는 것이다.

코끝·미간·단전 또는 외적 대상인 심장모양의 연꽃 등이 대상이 될 수 있다.

 

4 호흡에의 집중

마음을 고향으로 이끄는 것은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평온한 상태로 만드는 과정이다.

마음을 집중하는 훈련 중, 가장 흔히 쓰이는 방법은 오로지 어떤 한가지 대상만을 을 생각함으로써 다른 생각이나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과, 만트라의 울림소리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 그리고 하나의 의심 덩어리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 등이 많이 사용된다.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헤아림으로써 집중하는 명상은 가장 흔히 쓰이는 기본적 명상법이다.

숨이 들어올 때 숨이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고(홍), 숨이 나갈 때 숨이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소)이다.

의식을 어떤 특정한 상태로 만드는 것보다는, 우리의 의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더 효율적인 수행법이다.

호흡에 맞추어 1부터 시작하여 100까지를 세고 다음에는 거꾸로 100부터 1까지 다음에는 홀수만 세고 다음에는 짝수만 세기도 한다.

또는 간편하게 열까지 세기를 계속 반복한다.

하나·둘·셋·넷까지는 들이마시고, 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까지는 내쉬는 방법도 선호된다.

단전 아래까지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고, 아주 미세한 날숨이 빠져나가면 그 끝자락에서 숨의 진공상태를 유지하게 한다(호흡의 정지).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어리석음을 없애고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안 주는 방법이다. 즉, 집중력을 키우는 훈련이다.

호흡의 세기가 익숙해져 집중력이 고양되면 더 자연스러운 명상방법으로 옮겨갈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젠 숫자를 세는 덫에 걸리지 않고 호흡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이 호흡 그 자체가 될 때까지 호흡을 주시하고 느낀다.   

     

4 진언에의 집중

만트라의 암송은 만트라의 흐름만을 생각마다 이어지게 함으로써,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안 주는 방법이다.

만트라는 밖으로는 세상을, 안으로는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바꾸고 신속한 변형을 이루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만트라 수행은 마음을 집중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빠르고 효과적이며 성스럽고 강력한 힘을 가진 말이다.

신의 언어라는 산스크리트어 원음 그대로 발음한다.

만트라를 해석하지 않는 이유는 만트라가 지닌 문자적 의미보다는 에너지 울림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만트라에는 옴 마니 반메 훔, 옴 치림,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 사바하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짧은 만트라를 진언, 긴 만트라를 다리니라고 한다.

 

5 화두에의 집중

의심법(疑心法)은 화두법(話頭法)이라고도 하며, 선(禪)에서는 가장 중요한 최후의 공부방법으로 여긴다.

이 방법은 최후에 공부를 마무리할 때 즉 세번뇌를 없앨 때 쓰는 방법으로서 이 때는 스승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제자의 공부가 거의 끝나 갈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를 거량하여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준다.

이렇게 돈발된 의심 때문에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는 방법이다.

여기서 스승이 제자에게 의심을 돈발시켜주기 위해 거량한 격외도리(格外道理)가 화두(話頭)이다.

일단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를 던져 의심이 돈발하게 되면 제자는 오래지 않아 성품을 볼 수 있다(見性).

이러한 과정을 병아리가 부화될 때 어미가 껍질을 한번 쪼아 주어 병아리가 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비유하여 '줄탁지기'라고 한다.

돈발되어 불같이 일어난 강력한 의심의 힘으로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안 주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깊은 사마디(三昧)에 들게 되므로, 언하(言下)에 바로 견성을 하거나, 오래지 않아 견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를 들 때는 오로지 의심덩어리 자체가 되어야 한다. 360 혼신의 뼈마디와 8만4천 혼신의 털구멍을 의심의 덩어리로 뭉쳐, 화두 하나에 매달리다 보면, 마음은 점점 익어 어느 날 갑자기 안과 밖이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흡사 벙어리가 꾼 꿈처럼 스스로는 알되 다른 사람에게는 전해 줄 수 없는 그것을 자신이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는 지식의 울타리에 안주하고 있는 우리를 내모는 일차적 충격장치이다.

지식 속에 안주하고 있는 일상적 마음을 깨뜨리기 위한 수단이 화두이다.

지식과 상식이 짜 놓은 함정 속에 매몰되어 있는 한, 깨달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두는 속수무책의 의문을 만들어 주는 점화장치여야 한다.

이 속수무책의 의문을 해결하여 문제 밖으로 나서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영원히 생사의 언덕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다음 생의 윤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 화두 의심법의 원리가 결국 마음의 에너지를 한 곳에 모으는 역할에 있다면, 오늘날 스님들이 마치 아이에게 을떡 주듯이, 그냥 화두를 내주는 것은 무의미하다. 의심이 돈발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두는 구도자 각각의 개인에게 온 삶을 걸 수 있는 지고 지순의 하나로 주어져야 한다.

남이 한번 씹다 버린 껌은 향기가 없다. 만약 스승이 옛날 조사들이 쓰던 화두를 주려면 그와 비슷한 기연(奇緣)을 만들어 의심을 돈발시켜 주어야 한다.

오늘날의 우리 불교에서는 화두(話頭)에만 집착하면서, 화두를 드는 수행만이 최고의 지름길이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아집은 이미 남방불교나 티벳불교와의 국경선이 사라진 지금과 앞으로의 상황에서는 정저지와의 독선에 불과하다.

조사선의 화두만이 최고라고 고집하다가는 삶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화두는 집착을 여의기 위한 방편일  뿐, 그 방편에 다시 집착하는 것은 뗏목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옛 조사스님께서는, 큰 바위 짊어지고 어디들 가시는가고 납자들을 질책하셨던 것이다.

 

6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여

진정한 집중은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잘 때 잠자는 것이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빈틈없이 깨어 있게 되고, 광활한 평온상태 즉 명상상태에 있게 된다.

집중과 무념무상(無念無想)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

집중을 고도로 요하는 검도에서는 "적의 칼끝에 마음을 두는 것도 옳지 못하고, 단전에 마음을 두는 것도 옳지 못하다. 마음이란 어디에도 두지 않으면 어디에도 있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무기(無記)의 상태가 아니다.

마음의 통일을 방해하는 잡념이라든가 망상(妄想)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념(無念)이고 무상(無想)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념무상은 의식이 고도로 집중된 상태다.

독서에 몰두할 때나, 일에 전념할 때의 무아의 경지이다.

한가지 일에 모든 주의와 에너지가 집중되고 있는 이러한 사마디(三昧)의 상태서는 뇌파가 알파파(α波) 상태에 있다.

 

7 삼매가 주는 무한한 힘

집중 훈련은 마음의 중심(참다운 실재)으로 에너지를 모은다.

소방호스에서 나오는 물처럼 에너지가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나 레이저광선 또는 토치램프처럼 우리는 자유자재로 그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집중은 통찰력, 주의력과 순간마다의 자각을 배가시킨다.

깨어 있음(자각)을 통해 무언가를 바꾸지 않고도 삶의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명상의 기적이고 집중의 신비한 힘이다.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다면 찰나 속에 무한이 깃든다.

지금 이 순간 깨어 있음으로 인해 어떤 일에서나 깊은 충족감, 광활한 시야, 그리고 증가된 효율성이 내면에 깃든다.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다면 찰나 찰나에 무한이 깃든다.

지금 이 순간 깨어 있음은 모든 일에서 깊은 만족감, 드넓은 시야, 그리고 효율성을 지니게 된다.

집중(止)을 실천하면 마음을 순수한 하나의 점(點)으로 모을 수가 있다.

호흡을 주시하면서 이 주시(注視)라는 끈으로 마음을 부드럽게 묶어 부드럽게 끌어온다.

 

집중의 명상은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능력을 키우는데 있다.

집중력은 통해 마음의 힘을 키워서 감정과 반응을 조절하는 능력을 고양시켜 주며, 소망하는 것을 성취하는 능력도 강화시켜 준다.

 

8 삼매의 한계

집중이 심화되면 "지각하지도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영역(非常非非常處)"같은  최고의 신비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신비로운 경지는 마음이 창작해 낸 것이고,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며, 조건에 따르는 것이다(연기법).

그러므로 흔히 삼매의 경지를 깨달음이라 여기는 것은 착각일 뿐, 삼매는 우리에게 완전한 해방을 주지도 않으며, '궁극적 진리'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

사마디를 수행하여 깊은 정신적 몰입에 다다르면, 환하게 빛나는 듯한 상태에 도달하지만, 호수에 가라앉은 흙탕물이 그대로 여전히 존재하듯이,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들은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삼매에 빠졌다가 깨어난 시간이 일주일이라 한다 해도, 그 일주일이 다른 사람이 열심히 일하며 관계 속에서 살아간 시간보다 삶에 더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몰입은 그냥 얼어붙은 명상일 뿐, 흔히 사람들이 착각하듯이 무아지경의 체험이라고 해서 신비한 것도 그리고 훌륭한 것도 아니다.

 인도의 대서사시(마하 바라타, 라마야나 등)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엔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명상을 수련해 온 은자들(rishis)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들의 마음의 힘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강하다.

수백 년 동안 깊은 사마디에 들어가 있는 이들에게 누군가 방해해서 명상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면, 그들의 갑자기 거칠어진 마음은 엄청난 분노를 내뿜어 세 번째 눈이라고 하는 심안(心眼)에서 불을 뿜어 방해자를 태워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하늘의 신들은 이렇게 강력한 정신력을 개발하고 있는 리시들이 자시의 위치를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고, 리시의 힘을 약화시킬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리하여 신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요정을 보내 유혹하게 했고, 그 의도는 성공했다.

리시는 잠깐 눈을 떴다가 아름다운 요정을 보고 당장 덤벼들어 욕정을 발산했다.

마치 압력을 잔뜩 가한 주전자의 뚜껑을 갑자기 열어제친 것처럼, 아주 짧은 순간, 그가 지금껏 모아 왔던 힘들이 일순간에 흩어져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삼매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지혜를 개발하는 것은 어렵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방법을 무시한 채 위빠사나의 통찰 훈련만 한다면 이것은 그저 거품처럼 부글거리는 생각의 단편만 볼 수 있을 뿐, 근원적인 지혜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집중력을 키우는 훈련은 통찰력을 위한 도구마련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명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삼매를 명상의 목적으로 오인하기도 하지만,  이상 살펴 본 것처럼 삼매는 위빠사나를 위한 출발점에 불과할 뿐이다.

 연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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